홍수란
홍수는 강수량이 많아져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 물에 잠기고, 큰 피해를 입는 현상입니다.
조선시대의 홍수
조선시대에는 호우나 홍수의 정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큰 비를 중심으로 조사했습니다.
미우, 소우, 임우, 취우, 대우, 폭우, 홍수(대수) 중 대우, 폭우, 홍수가 큰 비에 속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홍수 피해
1404년 8월 24일
비가 크게 와서 성중(城中)에 물이 불어나, 시가(市街) 위의 물의 깊이가 10여 척(尺)이나 되었다. 풍반교(楓反橋)의 수문(水門)이 기울어져 성(城)이 이 때문에 무너졌다. 성중(城中)의 인호(人戶) 가운데 표류한 것이 35호였고, 반쯤 표류한 것이 69호였으며, 사람 가운데 익사(溺死)한 것이 12명이었고, 말이 40여 필이었다.
10척 = 300cm = 3m
3m는 일반적인 사람 키의 2배 정도 되는 높이이므로, 당시 시장거리에 사람의 통행이 불가하며, 많은 사람이 죽고 가구가 침수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1413년 5월 13일
경상도에 홍수가 나서 초계(草溪)·창원(昌源)·창녕(昌寧)·함안(咸安)·칠원(漆原) 등 지의 보리밭이 물에 잠겼는데 거의 4백결(結)이나 되었다.
4백결 = 2백만평 = 6.61157 km2
이는 이화여자대학교 면적의 12배보다 큰 크기입니다.
1417년 9월 27일
예빈소윤(禮賓少尹) 변계손(卞季孫)을 강원도에 보냈다. 강원도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 이백지(李伯持)가 “이달 초5일부터 8일까지 큰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육지에 물이 30리를 넘쳤습니다. 그래서 통천(通川)의 민가가 떠 내려 간 것이 5채이며, 빠져 죽은 남녀가 모두 15명입니다. 또 고성포(高城浦)에 정박한 군선(軍船) 2척이 떠 내려오는 큰 나무와 충돌한 후 파손되어 군인 10명이 빠져 죽었습니다. 또회양(淮陽) 임내(任內) 장양현(長楊縣)에서도 3가구가 떠 내려가고 두 사람이 빠져죽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임금이 노하여 ”통천군수(通川郡守) 강자명(姜自明)은 큰 비가 왔는데도 물가의 민가를 미리 옮기지 못하였고 고성포만호(高城浦萬戶)는 미리 병선을 붙잡아 매지 못하여 사람의 생명을 빠져 죽게 만들었으니, 모두법을 만든 의미가 없다“라고 말하고, 변계손에게 명을 내려 그 죄를 조사하고 심문하게 하였다.
30리 = 12km
이는 청계천의 길이인 10.84km보다 큰 거리입니다.
1467년 6월 28일
큰비가 내렸다. 한강(漢江) 물이 넘쳐 평지도 30척(尺) 깊이가 되었다. 병조(兵曹)에“지금 물이 넘쳐서 물가에 사는 백성들이 표류하고 빠져 죽는 지경에 이를까 걱정된다.이미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순찰을 돌면서 백성들을 옮기게 하였지만 혹여 소홀히할까 염려된다. 낭관(郎官)을 보내 다시 살펴 아뢰라.”고 명하였다.
30척 = 900cm = 9m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에 호우특보가 내려진 2011년 7월 3일, 탄천주차장의 침수가 9m에 육박한 것으로 보아, 이 당시 강수량은 호우 주의보, 호우 경보가 내려질 수준이었던 것으로 예상됩니다. 즉, 6시간 강우량이 70mm이상, 12시간 강우량이 110mm이상이었음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월별, 연도별, 지역별 빈도
조선 초기 중에서도 특히 1440년 이전에 큰 비 빈도가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와 같이 여름인 6, 7, 8월에 큰 비 빈도가 높습니다.
기록의 중심이 되는 서울을 제외하고,
한반도 동쪽에 위치한 강원도, 경상도의 큰 비 빈도가 높았던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강수 형태 이외에도 동쪽 지역에서 지형성 강수가 더해짐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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